충과 효의 정신이 깃든 닭뫼 숲
양성현감을 지내던 안귀행은 1455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권을 빼앗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불사이군 정신으로 벼슬을 내려놓고 1456년 남원부 백파방 여원치 아래 은거하였다. 그 이후 1567년 그 현손인 안신손 후손이 번성하여 크게 마을을 이루었는데 지금의 계산마을이다. 본래 계산마을은 아름다운 단풍나무와 바위가 많아 단풍나무 풍(楓)자와 바위 암(岩)자를 써서 풍암(楓岩)이라 불렀다. 이후 청룡산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면 풍수적으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과 같다하여 닭뫼, 닭매라고 불렀고 이를 한자로 바꾸면서 닭 계(鷄)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계산(鷄山)이라 하였다. 옛날 요천은 마을 앞 조성된 비보림을 따라 흘렀다. 요천의 풍경을 즐기기 좋은 곳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안신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풍와정(楓窩亭)이라는 정자를 세우기도 했다. 또 1659년 안희도의 부인인 합천이씨는 시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남편이 병에 걸려 병간호에 지극정성을 다하였으나 결국 세상을 뜨자 남편을 따라 자결을 택했다. 현종 7년, 나라에서 그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전해지도록 정려를 내렸고 그 정려각이 마을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