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백두산 천지에 섰을 때, 대륙의 바람 속에서 한 젊은 군주의 이름이 떠올랐다. 광개토대왕 담덕.
18세에 즉위한 그는 수세 대신 공세를 택했다. 백제를 압박해 한강 유역의 주도권을 확보했고, 후연을 요동에서 격파했다. 북방의 비려와 숙신을 복속시키며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는 단순한 확장이 아닌 고구려 중심 질서의 재편이었다.
신라에 5만 병력을 파견해 왜의 침입을 물리친 결단은 장수왕 대의 안정으로 이어졌다. 39세의 이른 죽음에도 22년 치세는 고구려를 동북아 강국으로 도약시켰다.
정복은 무엇을 남겼는가.
1. 백두산에서 마주한 대륙의 꿈
25년 전, 민족의 영산 백두산 정상에 섰던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천지의 푸른 물결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만주 대륙을 바라보며 묘한 전율에 휩싸였다. 바람 사이로 말발굽 소리가 스쳐 가는 듯했고, 황량하면서도 광활한 대지 위로 두 인물의 잔영이 어른거렸다. 어린 시절 만화 속 영웅이었던 남이 장군, 그리고 대학 시절 논문 속에서 치열하게 탐구했던 광개토대왕, 담덕(談德)이다.
그날 이후 광개토태왕은 내게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 이진희 선생의 고뇌 어린 비문 연구를 읽으며 사료의 치열함을 배웠고, 이수광의 소설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군주를 상상했다. 18세에 보위에 올라 39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그가 달려온 22년은 곧 고구려의 하늘이 넓어지는 과정이었다.
2. 칼끝으로 연 고구려의 천하
사람들은 흔히 그를 ‘무패의 정복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즉위 당시 고구려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남쪽의 백제, 서쪽의 후연, 그리고 북방 유목 세력의 압박은 나라를 풍전등화로 몰아넣고 있었다.
젊은 태왕은 수세가 아닌 공세를 택했다. 한강 유역을 둘러싼 대치 속에서 백제를 압박했고, 요동에서 후연의 군세를 격파했으며, 비려와 숙신을 복속시켜 북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었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었다.
특히 아신왕을 굴복시킨 남정(南征)과 요동 원정은 동북아 국제질서를 재편한 사건이었다. 그의 행보는 서구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떠올리게 한다. 짧지만 강렬한 생애, 전장을 누비며 스스로 시대를 개척한 군주. 그가 정복한 것은 단지 땅이 아니라, ‘고구려인’이라는 자부심과 대륙을 향한 기상이었다.
3. 비문에 새겨진 평화와 영광의 무게
오늘도 광개토대왕릉비는 천 년의 풍상을 견디며 묻는다. 정복은 무엇을 남겼는가.
신라에 5만 군사를 파견해 왜구를 격퇴한 결단,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된 군사적 우위는 훗날 장수왕 대의 안정으로 이어졌다. 대왕의 공세적 국방 전략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력한 ‘평화의 장치’였다. 외부의 위협을 선제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내부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39세.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22년은 고구려를 변방의 산악국가에서 동북아 패권국으로 도약시켰다. 아들 장수왕이 79년간 이어간 태평성대의 기틀 또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친구의 한마디—“정복자의 입장에서 써 보라”—는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했다. 광개토태왕은 과장된 민족주의의 상징이 아니다. 그는 혼란을 직시하고, 발로 뛰며, 칼로 증명한 실천적 지도자였다.
다시 만주 벌판을 상상한다. 그곳엔 여전히 말발굽 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 비록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영락(永樂)”이라는 연호처럼 그의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복은 끝났으되, 그가 열어젖힌 대륙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청춘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빛나사역사연구소 소장 김준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