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갈림길에 선 거인 : 신숙주, 변절과 실용의 경계에서
초등학교 시절, 나는 성삼문과 신숙주의 우정에 대해 책으로 처음 접했다. 조선에서는 이항복과 이덕형의 우정만큼이나 회자되던 관계였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며 결국 각자의 길로 갈라섰다. 그들의 우정은 격동의 시대 앞에서 시험대에 올랐고, 끝내 다른 결말을 맞았다. 이 글은 그 가운데 ‘변절자’라 불리기도 했던 신숙주에 대한 이야기다.
1. 엇갈린 운명의 서막: 집현전의 두 별
조선 초기, 세종의 치세 아래 집현전은 찬란한 학문의 요람이었다. 그 중심에 성삼문과 신숙주가 있었다. 세종은 어린 손자 단종을 이들에게 부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두 사람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1452년, 신숙주는 우연히 수양대군과 마주친다. 분경금지법이 엄격하던 시절이었지만, 명나라 사행길에서 두 사람은 긴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를 깊이 파악하게 된다. 수양은 신숙주의 탁월한 실무 능력을 알아보았고, 신숙주는 수양에게서 난세를 돌파할 강한 통치자의 면모를 읽었다. 이것이 훗날 거대한 선택으로 이어질 씨앗이었다.
2. 피의 비바람, 계유정난과 선택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조정은 피바람에 휩싸였다. 성삼문과 사육신은 ‘의리’를 택했고, 신숙주는 ‘국가의 존속’이라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는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훗날 사람들은 숙주나물에 그의 이름을 빗대어 조롱했고, 소설 『단종애사』는 그의 부인이 남편의 변절을 비관해 자결했다는 허구를 덧씌웠다. 그러나 실제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인은 사육신 사건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대중의 도덕적 분노는 종종 사실을 넘어선다. 하지만 신숙주의 선택은 감정이 아니라 국가 경영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3. 외교의 거장이자 실무의 화신
세조가 즉위한 이후, 신숙주의 역량은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안정시키는 핵심 인물이었으며, 일본과의 외교 지침서인 『해동제국기』를 편찬했다.
또한 조선의 통치 체계를 집대성한 『경국대전』의 정비에 참여했고, 역사서 『동국통감』 편찬에도 힘을 보탰다. 그의 공적은 단순히 권력에 협력한 수준을 넘어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제도화하는 데 있었다. 세조는 그를 당 태종의 명재상 위징에 비유했다. 이는 권력에 순응한 인물이 아니라, 직언과 실무 능력을 겸비한 정치가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4. 죽음의 문턱에서 던진 현실론
단종의 운명이 위태로워졌을 때, 신숙주는 냉혹한 결단을 지지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잔인한 배신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단종의 생존은 끝없는 복위 운동과 국력 소모의 불씨였다.
그는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의 안정을 우선했다. 세종과 문종이 다져놓은 문명적 성취가 권력 다툼 속에서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충성은 특정 군주가 아니라 체제에 대한 것이었다.
5. 문충(文忠)과 충문(忠文): 두 개의 삶
흥미롭게도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신숙주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앞에 오는 글자가 그들의 삶을 상징한다. 성삼문은 충성을 앞세웠고, 신숙주는 문치와 경륜을 앞세웠다.
조선 후기 숙종 대에 사림은 도덕적 명분을 강조하며 성삼문을 충신의 표상으로 세웠다. 반면 신숙주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문인 이건창은 시 「고령탄」에서 그의 고단한 삶을 연민했다. 역사는 한 인물을 단죄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시대는 그를 재평가한다.
6. 역사가 우리에게 묻는 것
종묘 공신당에 모셔진 신숙주의 위패는 우리에게 묻는다. 의로운 죽음과 현실을 감당한 삶,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가?
역사는 충절을 기리는 동시에, 제도를 만들고 시스템을 완성한 이들의 노고 위에서 유지된다. 신숙주는 변절자라는 낙인을 안았지만, 그가 다듬은 법과 제도는 조선 500년의 기틀이 되었다.
의리와 실용, 이상과 현실. 신숙주라는 인물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역사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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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사연구소 김준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