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여년 전 '가야 기문국'의 터전이었던 전북 남원 아영면의 역사, 문화, 민속을 한곳에 모은 전자책이 출간됐다. 책을 집필한 김용근씨는 현재 남원시 아영면 행정복시센터 총무계장으로, 남원시청 공무원이 '가야 기문국'에 대한 역사적 고견을 담아 화제다. 이번에 출간한 전자책에는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영고지'의 비문 탁본을 비롯해 천년의 음식, 지리산 소금길, 두락월산고분, 갈계전쟁농악, 마을유래, 전설, 고을의 어제(과거)와 오늘(현재)·흥부문화 등을 스토리텔링으로 수록했다. 지리산 남원 아영면은 1500여년 전 '가야 기문국'의 터전으로 오랜 세월 '은둔의 땅'으로 존재해 왔다. 또한 역사적으로 가야와 백제, 신라의 접경 두입지로 활용됐지만,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김용근 총무계장은 “'아영고지비'는 삼국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4층 석탑이 있었으나 일본이도굴해간후 1960년대 마을 사람들이 옛 기억을 소환해 흔적을 복원해 놓았을 뿐 그 실체가 묘연했다"면서 "최근 '아영고지비문'의 탁본을 발견되는 계기로 전자책을 발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향우들에게는 고향사랑의 마중물
가야 기문국이 있던 운봉고원에는 지리산 사람들의 자연 생태 가옥인 쇄집이 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리산 사람들의 전통가옥은 대부분 쇄집이었다. 해발 500m내외의 중산간 지방인 내기, 고촌, 회덕, 노치의 집들은 운봉고원의 대표적인 쇄집이었다. 쇄는 일년생 목초이며 산간지방의 산림이 우거지지 않는 건조한 지역에 자라며 가을이 되면 갈대꽃을 피우고 줄기는 단단하고 피막이 되어 있어 물이 쉽게 스며들지 못한다. 이 지역에서 쇄집이 주로 건축되었던 것은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의 운봉지역인 가야 기문 나라는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철에는 평야지보다 5도 이상 추운 곳이다. 그러다 보니 내린 눈이 쉽게 녹지 않는다. 그래서 지붕은 눈의 무게에 견딜 수 있어야 했다. 여기에 여름철 잦은 강우와 구름으로 인해 생기는 물기에 오래도록 잘 견딜 수 있어야 했다. 또한 고랭지의 특성으로 벼농사는 아주 어려운 곳이었기에 볏짚의 확보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집구조로 지붕에 쇄를 이는 집이 발달하였다. 쇄집 지붕의 수명은 40여년쯤이다. 그러하니 볏짚 지붕처럼 해마다 지붕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
남원시공무원이 운봉가야 기문국의 이야기를 전자책으로 발간해 화제다. 주인공은 남원시 대산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김용근씨(56·산업담당). 개인적으로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를 운영하며 남원의 문화와 역사, 전통을 연구하고 있는 김씨는 오랫동안 가야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연구해 이번에 ‘운봉가야 기문국, 크고 작은 이야기’를 펴냈다. 책에는 운봉고원의 역사 들여 다 보기를 시작으로 기문국 철도령과 염공주 이야기, 두락고분군의 비밀코드, 기문국 사랑유전자를 가진 모데미풀 이야기, 기문국 사람들의 잡곡식량이야기, 기문국과 말 이야기, 기문국 통치자의 모습, 기문국 주거 쇄집, 기문국 적 감시 레이더 봉수대 등 18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김 씨는 “1500년 전 운봉고원 기문국의 실체
지구의 작은 나라 한국의 남부에는 오래된 고을이 있다. 남원이다. 그 고을의 나이는 자그마치 1260살이다. 조선시대 중엽까지 여타한 고을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던 남원 고을을 세상으로 크게 나아가게 한 사건은 동편제의 출현이었다. 남원식 고을마케팅의 마중물이던 소리판은 조선의 놀이판이었고 그곳에서는 춘향, 흥부 같은 남원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이후 남원은 조선 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고, 광한루는 맨 먼저의 대상이었다. 남원 사람들은 그 광한루에 사농공사, 남녀노소, 동서남북의 조선 사람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를 담았고 꿈을 가지게 했다. 그 꿈은 지금도 꾸어지고 있고, 모든 이의 가슴에서 자라고 있다. 조선식 고을마케팅으로 대박 난 남원의 동편제는 그 유통망이었다. 남원이라는 정체성의 이름을 가진 1260년의 연대기 동안 광한루는 남원사람들의 결집체였고 조선 사람들의 융합체였다. 동편제 판소리를 통해 조선팔도의 구석구석에서 펼쳐진 남원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소통체였기 때문이었다. 그 실체는 남원이지만 지금세대 모두의 문화유전자다. 우리는 향토의 자치 시대에 살고 있다. 자기 주변 십리안의 것만 제대로 알아도 향토인이다. 고을의 향토문화가 앞과 뒤
지리산 남원고을에는 화려하고 실측적인 조선시대의 다양한 행정지도가 있다. 이 지도들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나는 그 지도를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조선시대 남원부의 아전이었던 후손의 구전을 조사했다. 조선시대 새로 부임한 사또는 고을 백성들의 민심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증의 열쇠는 당시에 그려진 고지도에 많이 보인다. 사또의 재임기간은 수개월에서 일,이년 남짓이다. 새로 부임하는 사또가 가장 먼저 알아야 했던 것은 고을 백성들의 민심이었고 아전들은 첫 업무보고 때 지역민심을 보고했다. 이후 사또는 고을 원로와 유지들을 만나면서 정무적 민심을 들었다. 사또의 민심 살펴보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터에도 나가서 직접 듣는 발품 민심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전들로부터 날마다 보고 받은 민심이 제대로 살펴져서 사또에게 전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전들이 고을 토족들과 함께 지역의 민심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억울한 백성들의 민원은 어떤 경로로 전달되는지 아니면 묵살되는지 또한 아전들이 고을의 사정을 책상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잘 살피고 있는지가 걱정이었다. 사또는 그것을 알아내는 방법으로 아전들을 모아놓고 고을
우리 조상들은 조선팔도를 금수강산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다. 어느 한곳 사람 살지 못할 곳이 없으니, 조선은 천국의 땅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감록이라고 부르는 책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열 군데를 지목했다. 이른바 십승지지가 그것이다. 그 십승지지 중에, 지리산의 운봉이 있다. 정감록에 표시된 십승지는 상도 풍기의 차암 금계촌, 화산소령의 옛 땅인 청양 현으로 경상도 동쪽마을,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 네 시루목이 연결된 곳, 전라도 남원의 운봉행촌,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 유구마곡의 두 물길 사이,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 상류, 전라도 무주의 무봉산 동쪽 동방산동, 전라도 부안의 금바위 아래, 경상도 합천의 가야산 만수동을 이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들 십승지지의 땅이 예로부터 질병이 없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전쟁이나 범죄가 적거나 없어서, 사람살기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 지리산 운봉이 왜 십승지에 들어 있을까? 지리산 운봉은 가야로부터 삼국,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요충지였고,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냉해가 심해서 농사가 잘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십승지의
지리산 남원 정령치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수분계를 가진다. 정령치에서 발원되는 물은 경상도 낙동강을 따르고, 또 한 줄기는 전라도 섬진강을 따른다. 물은 지역을 가르고 강을 만들기도 하지만, 용을 길러 낸다. 먼 옛날 지리산에 용이 열한 마리 내려와 살았다. 하늘을 날던 용 열 한마리가 각자의 삶터를 찾아다니다가 지리산을 지나게 되었다. 한 마리는 달궁에 내려앉았고, 나머지 열 마리는 용궁 마을에 내려서 터를 잡고 살았다. 달궁은 정령치에서 발원되는 상서로운 물이 연중 마르지 않고 내려오는 곳이었고 용궁은 정령치의 기운을 가진 영제봉에서 발원되는 상서로운 물이 사시사철 흐른 곳이었기에 용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정령치를 담벼락으로 삼아 이웃하던 용들은, 훗날 달궁에 왕이 사는 궁터를 내었고, 또 한편에서는 구룡계곡과 용담사를 내었다. 용궁 마을에 살던 열 마리 용들은, 오랫동안 살던 정들었던 터를 떠나 이제 승천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용궁을 떠나 막 승천을 하려고 날개 짓을 한번 하는 순간, 하늘이 내린 신선이 살던 계곡을 지나게 되었다. 계곡은 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창조 해낼 수 없는 비경이었다. 가장 앞에서 날던 우두머리용은 계곡의 비경에 감탄하여
상처는 영원하나 아픔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 때 송진채취로 생긴 상처를 안고 살아온 소나무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시절 송진채취로 상처 난 소나무가 살고 있다 농촌의 작은 마을에 40호 남짓한 집들처럼 저 소나무들도 40여 그루 쯤 된다. 일제는 저 소나무들에서 송진을 채취하여 연료로 가공하여 전쟁물자로 사용했다. 그때의 상처 난 흔적이 지금도 뚜렷하다. 저 소나무가 그때로부터 100년 가깝게 살아내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인 삼 세대를 너머 왔다. 그러하니 그때의 일이 구전으로 뜸성 거리며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소나무에서 피를 뽑는 일을 해야 했던 할아버지 세대들의 마음 고통을 치유해내는 것은 할머니들뿐이었다. 명절날 그 소나무 밑에 작은 고사상을 올려주는 것이 전부이어야 했던 그 일마저도 이제는 화석 된 이야기일 뿐이다. 저 소나무의 상처는 영원하나 나라와 국민이 받아야 했던 고통은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지리산에는 일제가 남긴 상처의 흔적이 많다. 그중에서 남원은 일본과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의 역사가 존재한다. 멀리 고려 때의 운봉 황산대첩, 조선의 남원성 전투, 그리고 근대 일제강점기 자원수탈의 현장은
파근사의 백천수 샘은 조선군 천명과 같았다.폐허가 될 줄 알면서도 절터를 내어 준 곳이 지리산 남원에 있고 그곳은 지리산 남원 고기리에 있었던 파근사다. 파근사에 관한 기록은 ‘난중 잡록’과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경기도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아미타여래상에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 외에도 파근사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가졌다. 고려 중엽 지리산을 유랑하며 도를 닦던 노승 한분이 정령치 아래 깊은 골짜기를 지나다가 등에 메었던 바랑을 내려놓고, 목을 적시려고 물을 찾았다. 마침 근처에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샘이 있었다. 노승이 고개를 숙여 샘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려는 순간, 물이 갑자기 말라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노승은 잠시 좌정을 하고 염불을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샘에서 물이 펑펑 솟아 나왔는데 쌀뜨물이었다. 그런데 노승의 꿈에 부처님께서 이르기를 백천수(白泉水)의 샘이 파괴되면 절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노승은 그곳에다 절을 짓고 이름을 파근사라 지었고, 그 샘 이름을 백천수라고 했다. 어느해인가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요천 상류에서 흘러드는 쌀뜨물로 요천수가 온통 하얗게 되었다
둘레길 남원 운봉 구간을 다녀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담아가는 사진 모델이 있다. 어찌 보면 도깨비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우리네 외할아버지 같기도 한 그 장승에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사진제공 김용근님 400년 전 왜적에게는 도깨비로, 오늘 우리들에게는 친근한 할아버지가 되는 두 얼굴을 가진 운봉 석장승은 고을을 지켜 온 이야기를 가졌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길목에 있는 운봉 마을들의 장승 모습은 무섭게 생긴 게 특징이다. 왜 일까? 고려 말 이후로 왜적의 침입이 많았던 운봉 사람들은 밤을 이용하여 왜적을 습격하여 무찔렀다. 그 선봉에 섰던 이들이 운봉에 살던 광대들이었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야간에 잠복해 있다가 마을로 식량을 약탈하러 오는 왜적들을 물리쳤다. 얼굴에 도깨비 탈을 쓰고 순식간에 나타나서 왜적들의 목을 베고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광대들을 왜적들은 가장 두려워했다. 마을 사람들은 왜적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도깨비 탈을 쓰고 활동하던 광대 의병의 모습을 마을 입구에 장승으로 세워 용맹성을 표시했다. 왜적들은 그 돌장승을 보기만 해도 도망을 가게 되었다. 그 후로 돌장승을 세워 두었던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