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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쏜 직격탄에 쓰러진 청년 노동자 이석규”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30주기

이석규 열사는 1966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에서 출생했다.

1982년 용북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려운 집안형편을 돕기 위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광주직업훈련원을 다녔다.

1984년, 훈련원을 수료한 그는 (주)대우조선에 입사해 선각소 조립부에 근무했다.

1987년도는 6월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고에 이어 7월말부터 전국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 투쟁의 해였다.

대우조선에도 당연히 이러한 열기가 몰아쳤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당해 왔던 멸시와 천대의 굴레를 그들의 힘으로 박차고 일어났고 그들이 지닌 힘에 스스로 경악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인지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면서 깨달아 갔다. 과격분자들의 파업 난동 때문에 민주화 기회가 무산된다는 보수 언론의 악의적인 기사들이 요란했지만 한 번 터져버린 봇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특히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군 근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으려던 노동자들도, 마침내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렸다. 이석규 열사도 그 가운데 한 사람 이었는데 산업체 근무 4년차였다.

8월 22일 대우조선 사측과 협상이 결렬되자 동료, 가족들과 평화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지 않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앉은걸음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찰은 직격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골목 구석까지 쫓아가서 짓밟고, 옷을 발가벗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아이들과 임산부까지 나선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짓밟던 와중 이석규 동지가 직격최루탄을 오른쪽 가슴에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22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당시 민주동지들은 ‘이석규 열사 민주노동자장’의 장례위원회를 구성, 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 어머니)가 장례위원장을 맡고 노무현 변호사(전 대통령)가 열사 사건의 진상 조사활동 등을 벌였으나, 노동쟁의조정법의 독소조항인 ‘3자 개입 위반’ 및 ‘장래방해’ 혐의로 구속돼 23일만에 풀려났다)

이후 민주동지들의 장지인 망월동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런 장지의 변경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살인경찰 구속과 피해보상, 휴업 조치 철회의 조건이 수락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으나, 정권과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동쟁의 방법이라고 일제히 일방적으로 보도하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다. 여기에 공권력은 시신을 탈취하여 이곳 고향땅 사매면 관풍리 선산의 아래쪽에 안장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결과로 노동조합의 수는 증가 하였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유익한 조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의 이념과 기능을 체득할 수 있었고,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는 유효한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석규 민주노동열사가 살았던 당시 노동 현장은 월 400시간 이라는 노동시간과 저임금 체로 걸러내기 방식(요즘 블랙리스트) 해고와 같은 노동 탄압의 시대였다. 이에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노동악법 개정, 노동3권 보장, 자유로운 노조결성 보장, 블랙리스트 철폐, 생존권보장(권리, 이익, 인권 등), 작업조건 개선, 저임금 개선을 외쳤다.

그러나 1980년대 외쳤던 노동의 문제가 2017년 지금도 개선되지 못한 이 사회를 보면서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30주기를 맞이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 무거움을 느낀다.

/글=이석규 열사 30주기추모식 집행위원장 소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