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층 아래로 가라앉은 청춘의 풍경과, 흠집 난 역사가 뿜어내는 찬란한 생명력에 대하여
기억의 갈피를 조심스레 더듬어 오르면, 청춘의 한 페이지에 짙게 인화된 남원의 풍경이 아련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985년, 대학 2학년 시절의 봄,
다산 정약용의 웅숭깊은 숨결이 배어 있는 강진의 초당을 지나, 고산 윤선도의 꼿꼿한 자취가 남은 고택을 어루만지고, 해남 대흥사의 장엄한 산세를 마음에 담은 뒤 넘어온 남원은 우리에게 단순한 기착지가 아니었습니다. 평생토록 낡은 사료의 먼지를 마시며 역사의 궤적을 좇게 될 젊은 학도들에게, 그 시절의 고적 답사는 학문의 단단한 뼈대를 세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벼리는 뜨거운 통과의례와도 같았습니다.
지금처럼 광한루 곁에 매끈하게 포장된 번듯한 주차장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멀찍이 차를 대고 굽이치는 강둑을 따라 걷던 그 비포장 길 위에는, 청춘 특유의 낭만과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치기 어린 호기가 툭툭 불거지는 흙먼지처럼 일고 있었습니다.
강둑길에서 마주한 날것의 생명력과 청춘의 해학
발해사를 전공하셨던 은사님의 넉넉한 걸음을 필두로 선후배들과 어울려 걷던 그 강둑길의 기억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절로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한 편의 해학적인 촌극입니다.
맨 뒤에서 일행과 보폭을 맞추며 걷고 있을 무렵, 앞에서 터져 나온 낄낄거리는 선배의 웃음소리와 그 손끝을 따라간 곳에는 잔뜩 흥분한 수말 한 마리가 콧김을 뿜으며 서 있었습니다.
난생처음 목도한 거대한 원초적 생명력 앞에서, 우리는 고매한 역사의 진리를 논하러 가는 길목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참으로 볼품없는 존재"라며 실없는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고상한 지식의 탑을 쌓아 올리려던 젊은이들이 마주한, 그 숨길 수 없는 날것의 본능. 훗날 숱한 사료의 행간 속에서 인간의 고상함 뒤에 똬리를 튼 날것의 욕망과 모순을 마주할 때마다, 그날 강둑길의 수말은 묘한 경외감과 함께 불쑥불쑥 떠오르는 유쾌한 서막이 되었습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본성을 외면한 채로는 결코 인간의 역사를 온전히 직시할 수 없음을, 그 우스꽝스러운 순간이 넌지시 일러주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스물일곱 가지 찬에 담긴 남도의 풍류, 그리고 상실의 우수
그 강둑길에서의 날 선 유쾌함은 광한루 곁의 식당에 이르러 커다란 경이로움으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답사의 실무를 맡아 미리 예약해 두었던 '이도령과 성춘향'이라는 이름의 식당. 낡은 상 위에 겹겹이 차려진 스물일곱 가지의 찬을 하나하나 세어보며 우리 일행은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1인당 단돈 3,500원.
그것은 자본의 논리로 계산된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남도 제일의 풍류였으며, 주머니 가벼운 청춘들을 품어주는 넘치는 인심이었습니다.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숟가락을 들었던 그날의 식사는,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풍성하고 따뜻했던 만찬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4년의 세월이 흘러 고단한 대학원생의 신분으로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에도, 식당은 4,000원이라는 여전히 겸손한 가격으로 스물일곱 가지의 찬을 변함없이 내어주며 치열했던 청춘의 허기를 달래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심한 시간은 눈앞의 풍경을 지우고 오직 마음속 기억만을 남기는 법입니다. 어느덧 예순의 나이에 접어들어, 남원에 터를 잡 최종인선생의 초대로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그곳에서 저는 짙은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기억 속 그 푸짐했던 식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스물일곱 개의 접시 위로 피어나던 청춘의 웃음소리도, 풋풋했던 대학 시절의 학구적 열정도 이제는 시간의 지층 아래로 화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듯했습니다.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와 명멸을 지켜보는 것이 평생의 업이었건만, 내 개인의 작은 역사 속에서 공간 하나가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주는 헛헛함은 사뭇 철학적인 우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광한루의 그림자, 그리고 명재상 황희의 숨겨진 민낯
식당의 다정한 온기는 바람결에 흩어졌으되, 광한루는 영원의 시간을 덧입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옛사람의 숨결을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남원과 광한루, 그리고 춘향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대한 낭만적 서사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유려하고 웅장한 누각의 첫 주춧돌을 놓은 이가 누구인지, 그 기둥에 어떤 짙은 그림자가 스며 있는지 아는 이는 드뭅니다. 춘향의 애절한 연가 이면에는, 조선 제일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상징으로 불리는 황희의 복잡다단한 생애가 서려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황희를 한 점 티끌 없는 청렴결백의 표상으로 우러러보지만, 그의 삶은 동화 속 성인군자처럼 무결하고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태종의 진노를 사 이역만리 남원으로 유배되었던 시절, 그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한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 자연과 벗하고자 건립한 것이 바로 광한루의 전신인 광통루(廣通樓)입니다.
훗날 세종 16년(1434년), 정인지가 그 빼어난 풍광에 매료되어 달나라 상아가 산다는 광한청허부에서 이름을 따 '광한루'라 명명하기에 이릅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장대한 규모에, 옆에서 볼 때 마치 새가 비상하듯 유려한 팔작지붕을 얹은 이 건축물은 감히 조선 누정 건축의 백미라 할 만합니다. 사계절의 풍류를 오롯이 품어낸 이 공간은 정유재란의 무자비한 겁화 속에서 잿더미가 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으나, 질곡의 역사를 기어이 버텨내고 다시 일어선 우리네 자화상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사료의 행간을 파고드는 탐구자에게 광한루는, 춘향의 연서보다 '황희'라는 인물의 실체적 진실을 묻는 거대한 질문표로 다가옵니다.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에 황희의 졸기를 벼리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평했습니다.
그는 구름 위를 걷는 급진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두 발을 굳게 땅에 디딘 철저히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경륜가였습니다.
난립하는 주장의 홍수 속에서 대국적인 시각으로 중심을 잡는 그의 조정 능력이 세종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국중사 앞에서 대나무처럼 꼿꼿했던 이 거인에게는 '핏줄'이라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었습니다.
유독 가문과 가까운 이들의 허물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순을 보였던 것입니다. 사위와 아들 등 일가친척의 대형 범죄를 은폐하려다 발각되거나 이들을 노골적으로 두둔하여, 그 드높았던 명예가 속절없이 곤두박질치기도 했습니다.
당대 사대부의 서슬 퍼런 기준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비위 행위였습니다. 평상시에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강직했으나, 가문의 안위라는 사적 욕망 앞에서는 얼마든지 흙탕물을 뒤집어쓸 수 있었던 모순된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두운 오점조차 그가 바친 국가적 기여라는 거대한 저울 앞에서는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아이러니가 바로 황희라는 인물의 진짜 얼굴입니다.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생명력
삼십 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다시 마주한 남원의 짙은 풍경 속에서, 저는 청춘의 날 강둑에서 보았던 수말의 적나라한 본성과, 3,500원이라는 값에 스물일곱 가지 반찬을 내어주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옛 식당의 온기, 그리고 영욕이 교차하는 황희의 삶을 가만히 겹쳐 봅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히 변치 않는 풍경 또한 없습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볼품없으면서도 위대하고, 고상하면서도 치욕적인 욕망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복합적인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사랑하는 광한루의 처마 끝에는 춘향의 순결한 일편단심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세속적인 번뇌를 껴안아야 했던 늙은 재상의 짙은 한숨이 배어 있습니다.
1985년 흙먼지 날리던 강둑길에서 터져 나오던 청춘의 실없는 웃음소리처럼, 역사 또한 그 거친 불완전함과 모순 속에서 비로소 찬란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 이제는 예순을 넘긴 늙은 연구자가 되어 광한루의 낡은 기둥을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사라진 식당의 헛헛한 빈자리에는 남원의 맑은 바람만이 머물다 가고, 역사의 행간 속에 숨은 황희의 두 얼굴은 저무는 노을빛에 어스름히 물들어 갑니다.
지나온 삶의 굽이굽이와 옛사람의 치열했던 자취가 하나의 문장으로 엮이는 이 공간에서, 저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빛바랜 시 한 편을 적어 내려갑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듯해도, 결국 이토록 깊고 그윽한 그리움을 남겨놓는다고 말입니다.
.빛나사역사연구소 소장
김준권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