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권 칼럼] 포도밭 바람결에 실려 온 1500년의 제국...남원 유곡리·두락리에서 가야를 읽다

  • 등록 2026.03.19 14: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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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에서 드러난 가야의 흔적
영남을 넘어 호남까지 확장된 1,500년 철의 문명
묻혀 있던 고대사의 퍼즐을 다시 맞추다

포도밭 바람결에 실려 온 1500년의 제국

남원 유곡리·두락리에서 가야를 읽다

 

김해 김씨, 부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옛 가야를 걷는 이

나는 부산 사람이다. 낙동강 하구의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일상이 된 곳, 귓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 내가 가야(加耶)라는 이름에 깊이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나의 본관이 김해(金海)이며, 금관가야의 문을 연 김수로왕의 74세손이라는 혈연적 기원 때문만은 아니다.

 

발길 닿는 영남의 흙 한 줌, 돌 한 덩이마다 묻어 있는 옛 가야인들의 짙은 숨결이 무의식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나를 호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적 여정의 닻을 중국사라는 거대한 대륙에 내렸지만, 내 마음 한편에는 늘 해소되지 않는 짙은 아쉬움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한국 고대사를 전공했더라면,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세월 속에 무참히 왜곡되고 잊힌 우리 옛 왕국들의 퍼즐을 내 손으로 맞출 수 있지 않았을까.’ 거대한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탐구하면서도, 식민 사관과 후대 사가들의 무관심 속에 반쪽짜리 역사로 전락해 버린 가야를 떠올릴 때면 그 망상 같은 아쉬움은 이내 뜨거운 학문적 갈증으로 변하곤 했다.

 

 

그러던 몇 해 전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남원의 최종인 선생 초대로 아내, 처남 부부와 함께 전북 남원 인월읍에 자리한 포도밭을 찾았다. 달콤한 포도 향이 늦여름의 햇살 아래 농밀하게 익어 가는 그 평화로운 농원 한편에서, 나는 시간의 지층을 뚫고 솟아오른 거대한 역사의 증거와 마주했다.

 

지리산의 험준한 능선을 넘어 호남의 심장부에 굳건히 뿌리내린 가야의 깃발, 바로 남원 안월면 유곡리 성내부락 주변의 작은 언덕과 그 북쪽 두락리에 흩어진 삼국시대 무덤들이었다. 영남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가야가 이곳 남원의 붉은 흙 아래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 지적 충격을 넘어선 묵직한 전율을 안겨주었다.


침묵하는 흙더미가 들려주는 철과 불의 서사시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가야의 서북쪽 경계를 ‘지리산’으로 한정 지었다. 오랜 세월 우리는 그 좁은 틀 안에 가야를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의 대지는 문헌의 침묵을 깨고 진실을 웅변하고 있었다.

 

직경 5~6m, 높이 4m에 달하는 거대한 봉분들은 비록 오랜 세월의 풍파와 무지한 도굴, 개간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500년 전 이 땅을 호령했던 이들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흙더미를 헤치고 나온 유물들은 대가야 특유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굽다리접시(고배)와 곧게 뻗은 긴목항아리(장경호)는 흙을 빚어낸 가야 장인의 체온을 전해 주었고, 가야의 상징이자 권력의 척도였던 쇠 낫과 철봉, 말 재갈은 ‘철의 제국’이 품었던 무사들의 거친 기상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냈다.

 

5~6세기경, 쇠를 달구던 뜨거운 불길과 말발굽 소리가 이 평화로운 언덕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더욱이 유곡리·두락리 일대에는 늦어도 3~4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독무덤(옹관묘)이 흩어져 있다. 밑부분이 둥근 연질의 대형 항아리 두 개를 연결하고 문살무늬가 찍힌 적색 주발형 토기를 품은 이 무덤들은, 가야의 문화가 유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 남원 땅에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토착 문화의 짙은 연륜을 보여준다.


영남과 호남, 가야와 백제가 빚어낸 웅장한 교향곡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우리 고대사에서 지니는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호남에서 발견된 가야 무덤’이라는 타이틀에 머물지 않는다. 이 무덤들은 획일성을 거부하고 다름을 껴안았던 고대인들의 놀라운 ‘문화적 융합’을 증명하는 타임캡슐이다.

 

이곳의 고분들은 기본적으로 대가야 양식을 따르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 둘레돌(호석)을 두르지 않고 바닥에 돌을 깔거나 진흙을 바르는 가야의 보편적 방식을 따르면서도, 제4호분처럼 바닥의 자연 흙을 그대로 이용하는 등 지역의 독자적 방식을 가미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가야의 무덤들 사이로 백제의 강한 향기가 배어든 굴식돌방무덤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특히 굴식돌방무덤 내부에 대가야 중심지인 고령 고아동식 고분처럼 회칠을 한 흔적은, 대가야와 백제라는 두 거대 문화가 남원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고 섞여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곡리와 두락리 일대에 이토록 거대하고 조밀한 봉분을 축조했던 세력은 결코 대가야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변방이 아니었다. 이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재지(在地) 세력으로서 대가야와는 간접 지배 또는 느슨한 연맹 관계를 맺으며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가야의 깃발 아래 서 있으면서도 서쪽 백제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토착성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획일적인 중앙집권을 향해 피 흘리던 쟁패의 시대에, 영남과 호남의 문화를 하나로 버무려 낸 이들의 유연성과 포용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잃어버린 반쪽을 넘어, 온전한 우리 역사의 아침을 깨우며

남원의 달콤한 포도 향을 품고 불어오던 바람은 단순한 자연의 숨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1,500년 전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을 아우르며 영호남을 관통하는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했던 우리 선조들의 거친 호흡이었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이 씌운 굴레와, 현대의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주의적 편견을 뛰어넘으라고 외치는 고대인들의 준엄한 목소리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스러져 간 실패한 연맹체가 아니다.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한반도의 고대사를 직조해 낸 당당한 주역이자,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했던 지혜로운 문명이었다.

 

중국 대륙의 웅장한 역사를 좇던 나의 학문적 시선은 이제 지리산을 넘어 남원의 붉은 언덕으로 온전히 향하고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 유곡리와 두락리의 파편들을 하나둘 어루만질 때, 비로소 우리는 반쪽짜리 고대사에서 벗어나 가장 온전하고 풍요로운 한반도의 역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잊혀진 제국, 호남 가야의 찬란하고 붉은 아침이 다시 밝아오고 있다.

 

빛나사역사연구소 소장 
김준권(문학박사)

최종민 기자 ccj95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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