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권 칼럼]천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욕망과 현실의 경계에 선 정치가, 한명회를 위한 변론

  • 등록 2026.03.10 15:13:39
크게보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은
주인공 엄흥도도, 단종도 아닌 바로 한명회로

 

스크린 속의 빌런, 혹은 역사의 설계자

 최근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가족들과 함께 관람했다. 이미 익숙한 역사적 줄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주는 긴장감과 몰입도는 대단했다. 흥행의 예감이 강하게 밀려오는 가운데, 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인물은 주인공 엄흥도도, 비운의 단종도 아닌 바로 한명회였다.

 

그는 전형적인 ‘악역’이자 현대적 의미의 ‘빌런’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만난 한명회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추하고 왜소한 책사가 아니라, 서늘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역사의 판을 짜는 거대한 설계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칠삭둥이'라 비하하며 그의 욕망을 뒤틀린 신체적 결함의 보상 심리로 치부하곤 했으나, 과연 그것이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일까.

 

남이의 칼끝에서 만난 권력의 비정함

내가 한명회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남이 장군의 전기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기개 높은 무장 남이. 그러나 그는 유자광의 고변과 한명회, 신숙주 등의 공격을 받아 처형당하고 만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남이의 옥’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인간관계의 얽힘이다. 남이 장군은 한명회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였던 권람의 사위였다.

 

성삼문과 신숙주, 이항복과 이덕형처럼 한명회와 권람은 시대를 함께 도모했던 죽마고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명회는 친구의 사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정치적 선택을 한다. 현실 정치는 의리보다는 생존과 권력의 논리가 우선함을 보여주는 서글픈 대목이다. 한명회에게 정치는 감정의 영역이 아닌, 철저한 손익과 안전의 영역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설중매와 칠삭둥이 : 각인된 이미지의 허상

우리가 기억하는 한명회의 시각적 이미지는 아마도 고(故) 신봉승 선생의 대작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에서 완성되었을 것이다. 배우 정진 씨가 연기한 한명회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10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늙은 여종의 품에서 솜털에 싸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던 비천하고 병약한 태생. 배 위에 새겨진 북두칠성 모양의 점은 그가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음을 암시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우리가 '칠삭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그를 외모 콤플렉스에 찌든 인물로 바라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대 기록을 살펴보면 한명회는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남과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청주 한씨 집안답게, 실록은 그를 ‘키가 큰 미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거정이 지은 <신도비명>에는 "얼굴이 잘나고 키가 커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대하였고 기개가 우뚝 섰다"고 적혀 있으며, 명나라 사신 예겸 역시 그의 풍채를 "옥처럼 섰고 태도가 빼어났다"고 극찬했다.

 

야사 속의 주먹코와 사팔뜨기 이미지는 후대의 대중매체가 만들어 낸 '음흉한 책사'의 스테레오타입일 뿐, 실제 그는 대중 앞에 섰을 때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던 거구의 정치가였던 것이다.

 

 

세조의 장자방, 권력의 정점에 서다

드라마 <한명회>에서 이덕화 배우가 보여준 모습은 그를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격상시켰다. 철저한 실록 고증을 거친 이 작품은 한명회를 단순한 간신이 아닌, 시대를 읽는 눈을 가진 전략가로 묘사했다.

 

세조는 그를 가리켜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 불렀다. 계유정난이라는 거대한 쿠데타의 설계자로서, 그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미리 간파해 별운검을 폐지함으로써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 그 공으로 그는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냈고,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며 왕의 장인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탐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훈구파의 영수로서 수많은 인재를 발탁해 재상으로 키워냈으며, 사재를 털어 성균관의 도서와 시설을 보충하는 등 교육에도 힘썼다. 당대 선비들이 그를 '비범하다'고 평한 것은 그가 가진 보스 기질과 통 큰 대인배적 면모 때문이었다.

 

현대에 살아 숨 쉬는 그의 유산 : 오가작통법과 면리제

한명회를 단순히 '정치적 술수꾼'으로만 치부하기엔 그가 남긴 행정적 업적이 너무나 거대하다. 그는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창안하고 면리제(面里制)를 실시했다.

 

놀라운 사실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면(面)'과 '리(里)'라는 행정 단위가 바로 한명회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500년 전 한 정치가가 설계한 통치 시스템이 현대 사회의 뿌리가 되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실무적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증명한다.

 

부관참시와 역사의 심판

화려한 생애와 달리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사후 17년,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지고 목이 베어지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압구정(狎鷗亭)에서 갈매기와 벗하며 유유자적하려 했던 그의 꿈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명회는 모범적인 도덕적 인물은 아니다. 명분 없는 쿠데타의 설계자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실록의 사관이 평가했듯, 그는 "도량이 크고 결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사내, 한명회. 그를 향한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을 달린다. 하지만 그가 설계한 행정 제도가 오늘날 우리의 주소지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그를 역사 속의 단순한 ‘빌런’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악인이었을지언정, 시대를 움직인 거대한 엔진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빛나사역사연구소 소장 김준권 문학박사

 

최종민 기자 ccj9510@naver.com
Copyright @2019 타파인. All rights reserved.



명칭(법인명) : (유)섬진강언론문화원 | 제호 : 타파인 | 등록번호 : 전북 아00497 |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시청로 34-1, 2층 | 등록일 : 2014-04-12 | 발행일 : 2014-04-12 대표 : 이상선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진주 | 대표전화 : 063-930-5001 | 팩스 : 0504-417-5000 타파인의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