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

  • 등록 2018.10.02 14: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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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문화적 특성
출처 http://www.namwon.jeonbuk.kr/

▲2016년 10월 지리산그란폰도 당시 지리산


남원의 문화적 특성

남원은 전라북도의 동남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경상남도의 함양군, 서쪽은 전라북도 임실군, 순창군, 북쪽은 장수군, 남쪽은 전라남도 구례군과 곡성군에 접하고 있다. 남원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할 뿐 아니라 수리시설이 잘되어 농업이 발달하였고, 천혜의 자연 환경과 문화유산으로 관광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는 도시다. 전라북도 지방에서 남원이 차지하는 역사적 문화적 비중은 대단하다.

 

통일신라시대 남원은 소경이 설치될 만큼 지리적. 정치적. 군사적 위상이 높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그만큼 국가적인 정책지원과 지배계층의 관심으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 풍요로움이 발전했던 곳이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발전은 불교.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민족의 영산, 어머니 산인 지리산의 서북관문인 남원은 예로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라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생리조(生利條)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 전라도 남원(南原)

이 있다. 벼 한말을 심으면 가장 많이 나는 곳은 140두를 추수할 수 있다.” 고 했다.

 

또 조선시대 전라감사를 지낸 김달순은 “호남에 와서 산은 지리산을 보았고, 사람은 이건을 보았다(於山見方丈於人見李健)” 고 하여 남원사람들의 인물됨을 평하고, 기상풍영(沂上諷詠) 융중산수(隆中山水)라 하여, “남원의 산천경개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잠이 산수가 뛰어난 기수(沂水)에서 풍영(諷詠)했다는 중국의 기수(沂水)와 같이 아름답고, 남원에 사는 사람들은 제갈공명이 산수를 즐기며 융중(隆中)에서 때를 기다린 것과 같다.” 고 하였다. 이는 남원 사람들의 기상과 남원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역사, 문화를 한마디로 함축한 말로 문화의 발상지요 중심지라는 의미로써, 예로부터 남원을 이야기할 때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

라 한 것은 괜한 소리가 아닌, 진정 하늘이 고을을 내려 그 속에서 사람이 고루 잘 살도록 정해준 땅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는 남원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는데 왕조문화부터 서민(기층)문화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문화재는 전국에서 제일 많고, 특히 효열비는 전국 두 번째로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남원을 충(忠) · 효(孝) · 열(烈) · 예(藝)

의 고장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주저 없이 남원을 이렇게 얘기하는 데는 그만큼 지리적 환경과 인문적 환경이 출중하다는 얘기다.

 

교통, 행정, 군사적 중심지로서 남원의 지리적 위치는 사람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며, 지혜로운 산, 생산과 창조의 근본 어머니 산인 지리산은 남원 땅을 향해 완만한 구릉을 형성해 그 풍부한 물산 속에서 사람을 여유롭게 살게 하여, 생원 진사 합격자 500여명을 배출해 냈는데 이것이 남원문화의 원동력이다.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언어다. 남원은 전북권의 그 어디와도 다른 남원만의 독특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남원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독특하고 훌륭했기에 다른 어느 문화가 유입되어도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유입된 문화를 남원문화 속에 동화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는 증거다. 이러한 토양을 토대로 남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러 고전문학 중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타령이 남원을 무대로 남원에서 창작되었으며,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나 전쟁포로를 소재로 한 피로문학(披露文學)의 장르를 처음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현대판 이산가족 상봉을 내용으로 한 최척전(崔陟傳)

도 우리 남원을 무대로 쓰여진 작품이다. 이러한 고전은 남원의 문화적 바탕이 그만큼 출중하며, 당시 사람들의 인간본위의 사상과 자연을 닮은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는 실증이다.

 

또한 남원은 국악의 성지 및 판소리의 발상지로서 오늘날 판소리 정형을 형성한 곳이며, 국난극복의 현장으로써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단초가 된 남원성 싸움 등이 남원 역사의 중심에 서있다.

 

남원은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늘이 정해준 땅 천부지지(天府之地)다. 그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조화를 이르고 자연을 닮은 마음을 표현해낸 것이 바로 남원 문화의 속성이다.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남원의 여러 문화 즉, 충 · 효 · 열 · 예, 그 속에서 ‘사랑의 정신’이 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남원만의 독특한 언어(말)

이며, 춘향전, 흥부전 등 남원의 4대 고전으로 일컫는 고전문학 속에 응축되어 있다.

 

문화는 고급문화에 동화되지만 남원은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고유한 옷을 입고 1300여년의 세월을 이어왔다. 그것이 757년 이후 한 번도 남원이란 이름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이 남원문화가 갖는 특징이며 본질이다. 이러한 문화의 속성을 우리 남원사람은 ‘사랑’으로 묶어내 남원을 상징하는 테마로 정하고 전국 최초로 테마도시를 선언하였다. 남원문화의 속성 ‘사랑’이 전 세계로 펼쳐나가고자 하는 의미인 것이다.

 

지리적으로 본 남원

남원지방의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이 뻗어나가고 있으며, 북쪽으로부터는 규모가 큰 진안고원(鎭安高原)

이, 서쪽으로 뻗쳐 영동으로부터 금산 · 진안 · 무주 · 장수 · 임실 · 남원 · 순창을 거쳐 전남의 곡성 · 구례 · 순천 · 광양 일대까지 뻗어 내리고 있다. 이 진안고원에는 북쪽으로 금강이 흘러가고, 남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서 남해안으로 들어간다.

 

남원과 관련이 있는 섬진강 유역을 살펴보면, 섬진강 유역은 다시 두 개의 지류에 따라 오수분지, 남원분지, 순창분지, 관촌분지, 마령분지 등 많은 분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남원분지는 그 규모가 가장 크고 평야가 넓은 지역으로서 옛날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玉野百里)라 불려 왔다. 천부지지(天府之地)란 하늘이 고을을 정해준 땅이라는 의미며, 옥야백리(玉野百里)

란 비옥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는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이 지역에서는 생산물이 풍부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 수 있는 곳으로서 그동안 많은 인물이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닌 게 아니라 남원지역은 산동면으로부터 요천수를 따라 평야가 양쪽으로 펼쳐져 전남 곡성군 오곡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백리에 이르는 넓은 들을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은 옛날부터 풍부한 물산(物産)

을 생산해냈고, 이 풍부한 물산이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들판 가운데로 섬진강의 상류인 요천수가 흘러가고 있어 이 섬진강을 통하여 수상교통이 매우 발달하여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소금 배와 고깃배가 올라왔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남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록(山麓)에서는 많은 산물(産物)

이 나오고, 특히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넓은 지리산 기슭에는 풍부한 임산자원이 있어 남원지역을 전라도 지역 가운데에서 가장 풍요로운 고을 중 하나로 성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여건 속에서 남원은 일찍부터 군사적, 역사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5소경 중의 하나로서 신라가 전라도 지방을 통치할 때 그 거점의 하나로 삼았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남원은 등급이 높은 부(府)

로서 적어도 현재의 전라북도 동남부 산간지대에 있어서 통치의 중심도시로, 생활의 중심도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전라도 일대에서는 전주 · 나주에 못지않은, 오히려 저들 도시보다 더 중요한 지역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그 뚜렷한 증거의 하나로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의 배출 숫자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한 사람들의 숫자 등을 비교해 볼 때 남원은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때는 물론,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도 계속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여러 가지의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남원의 지리적 요인 때문으로 해석된다. 즉, 지리적 요인으로서 남원지방의 교통관계를 들 수 있다. 남원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섬진강의 높고 낮은 고개를 통하여 전라도의 각 지방과 경상도와 연결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바로 이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이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게 만들었다.

 

섬진강은 현재 임실군 상류에 댐(운암댐)

이 막혀 있지만, 댐을 만들기 전까지는 그 지역은 산중 분지의 하나로서 운암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이 운암평야는 해발 200m도 채 못 되는 지형으로 여기서 낮은 고개를 넘으면, 동진강 상류인 칠보로 나가게 되고,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정읍 · 부안 · 김제 등의 평야지로 곧바로 통하게 되어있다. 또한 운암평야에서 북쪽으로 역시 낮은 고개를 넘으면 삼천의 상류 완주군 구이면 일대로 통하여 바로 전주 · 익산 방면으로 통할 수 있다. 그런 반면 내륙으로 남원에서 대산면 골짜기를 넘어 사매면 쪽으로 나가면 오수 · 임실 · 성수를 통하여 마령 · 진안으로 통할 수 있다. 그리고 남원의 북동쪽 장수 번암면을 지나 장수 · 장계 · 무주로 통할 수 있고, 서쪽으로 순창을 넘으면 담양 · 광주 · 나주 · 장성 방면으로 나갈 수 있다. 또한 곡성을 지나 옥과로 나아가 낮은 고개를 넘으면 화순 · 보성 · 나주로 나갈 수 있으며, 곡성을 거쳐 삼기면을 거치면 석곳 · 벌교 방면으로 나갈 수 있다. 또 하나 섬진강 상류인 요천수를 따라 내려가면 구례 · 하동을 거쳐 남해로 진출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남원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오늘날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백제시대 때는 백제의 수도와 일본 영도를 연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통과지역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18세기 초(1714년)에 <택리지(擇里志)

> 를 쓴 이중환은 만경강과 동진강을 이용하여 전주 덕진까지 고깃배와 소금배가 들어왔다고 하였다. 이렇게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배들은 낮은 노령산맥의 고개를 넘어가면 임실의 운암으로 도달할 수 있었고, 여기서 다시 배를 띄워 남원의 장수진을 거쳐 섬진강 하류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섬진강 하류는 백제시대 때에는 고해진이라고 했는데 백제 수도로부터 일본으로 출발하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남원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자리를 굳혀 전라선이 통과하고 또한 무주로 통하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팔량치를 넘어 경상도로 연결하는 도로가 있으며, 구례 · 하동으로 연결되는 도로, 정읍으로 연결되는 도로, 전주로 연결되는 도로 등 그야 말로 교통의 요충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지리적 요인이 전체적으로 사람들의 인문 활동을 규제하지는 않지만 이 지리적 요인과 사람들의 활동이 어우러져 새로운 지리적 요건이 형성된다.

 

그러나 남원은 근대에 들어와 다른 도시에 비하여 뒤져있다. 이미 1931년에 남원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市)

로 승격된 것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81년의 일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그 지방 사람들의 역할이 그 지방의 발전과 번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원은 앞으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

 

 

 

역사적으로 본 남원

모든 역사서를 보면 남원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첫 대목에, "남원은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이었다." 고 한다. 남원의 역사 · 지리지인 용성지(龍城誌)

의 기록을 보면,

 

"본래 백제의 고룡군이다. 후한의 건안년 사이에 대방군이라 하였다. 조위시대에는 남대방군이라 하고, 뒤에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 백제를 멸망시키고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대방주 자사를 겸임토록 하였다. 신라 문무왕이 그 땅을 병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왕 5년 소경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은 남원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940)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 부(府)라 하였고, 충선왕 2년(1310)에는 다시 대방군이라 하였으나 뒤에 남원군이라 하였다. 공민왕 9년(1360)에 다시 부로 승격하였고,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으며, 세조 때 처음으로 진(鎭)

을 두었다."

 

물론 고룡군이란 말이 옛날에 쓰였던 순수한 우리말로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말과는 구조가 달랐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순수한 우리말을 당시에 소리 나는 대로 적었던 것을 뜻을 취했던지, 아니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한자(漢字)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현재 고룡이란 말의 흔적은 교룡산(蛟龍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교룡산이라는 한자의 뜻을 따져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교룡이라는 명칭과 관련시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룡'이란 말이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시대에 따라서 이런 저런 식으로 바뀌어졌던 것이다. 원래는 '고룡'이었던 것이 오늘날의 '교룡'으로 음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며, 이것을 다시 한자로 옮기다 보니 기왕이면 근사한 문자를 찾아 그 가운데 용(龍)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교룡(蛟龍)'이란 말로 표기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본래 용(龍)이란 순수한 우리말로는 '미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르'란 오늘날의 물(水)과 관계가 있는 우리의 옛말이다. 그렇다면 '용' 그 자체도 물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남원의 지리적 요건을 생각해 보면 바로 섬진강과 이 용(龍)

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 남원이 대방군(帶方郡)이었다는 설이 있다. 즉 후한(後漢) 말기(2C∼3C 초)에 후한이 남원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2C말∼3C초의 후한은 멸망의 길에 접어들어 그 세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후한의 공손씨가 우리나라에 세력을 확장하여 낙랑군(樂浪郡)을 접수한 다음 오늘날 황해도 지역에 대방군을 설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때는 백제가 형성되기 이전이고, 더군다나 이 대방군의 세력이 이곳 남원지역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대방이란 말이 나오게 된 근거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백제가 멸망한 뒤 중국의 유인궤(劉仁軌)라는 사람이 백제에 주둔한 당(唐)나라 총사령관이었는데 그가 남원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남원을 대방군이라 하여 정전(井田)법을 시행하였다고 한데서 기인한다. 후세 역사가들이 이 내용을 토대로 남원에 가면 그 때 유인궤가 실시했던 정전의 터가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전제의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평양과 남원뿐이다. 정전이란 BC1000년경 중국의 북쪽을 지배했던 주(周)나라에서 실시했던 토지 제도다. 그런데 주나라에서 실시했다는 토지제도가 국가와 문화와 풍토와 생활습관이 전혀 다른 우리나라에서 실시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정전제도를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사람들에 의해 남원에서 실시되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당나라 때는 균전제(均田制)

가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660년 백제가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된 뒤 오늘날 변산반도 주위에 있었던 주류성에서는 약 4년간 백제 부흥운동이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그 부흥운동이 무너지면서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都督府)와 7개의 주(州)와 주 아래 51개의 현(縣)을 두어 주현제(州縣制)를 실시하였다. 이때의 7개의 주 가운데 대방주(帶方州)가 있었다. 그러나 이 대방주가 당시의 남원과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대방주는 오늘날의 전남 나주시 다시면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지금의 부여지방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 한 뒤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의 태자를 관리자로 임명하였으나 실질적 주도권은 당나라 주둔군 사령관에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전북지역과 전남지역 사이에는 노령산맥이 가로놓여 있어 당시 나주의 주위에 있었던 대방주를 지배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아 중국사람 유인궤를 이곳의 자사(刺史)로 임명하여 특수지역으로 관리하였던 것이다. 이 때 당시 남원지역은 어떠했는가? 백제가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기 전 백제의 영토는 소백산맥을 넘어 오늘날 경상남도의 서부를 비롯하여 낙동강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660년 백제가 멸망되자 신라는 이때부터 조금씩 점령하기 시작하여 당나라가 백제의 영토를 지배하게 된 때에는 이미 신라가 노령산맥의 동남부와 소백산맥의 동쪽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당나라가 백제의 옛 영토를 지배한 곳은 노령산맥을 넘어 평야지역이었기에 유인궤가 남원에 한 번쯤은 다녀갔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663년경에는 이곳 남원지역이 이미 신라에 소속된 땅이었다. 그 뒤 676년 신라가 당나라와 귀벌포에서 싸움을 벌여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우리나라에서 몰아내고 680년까지 백제의 옛 영토를 신라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그 후 681년 새로 편입된 백제의 옛 영토를 신라의 행정편제에 맞게 개편을 하여 685년에 백제의 옛 영토에 4주(州) 3소경(小京)

을 설치하였다.

 

이 때 현재의 남원지역에는 남원경(南原京)이 설치되어 남원지역은 신라의 지방통치에 있어 중요 거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약화된 통치권을 부흥하고 강화시키려고 중국의 제도와 질서 체제를 도입하였는데, 경덕왕 16년(757)에 당나라 도독부 제도를 모방하여 행정체제를 정비하고 모든 지명(地名)을 중국 당나라 식으로 고쳤다. 이 때 남원은 남원(南原)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전국을 통일하고 지방행정체제를 개혁하고 강화시켰는데, 태조 23년(940) 신라시대의 소경의 하나였던 남원경을 남원부(南原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다음 고려의 통치체제가 확고히 만들어지는 현종 9년(1018)까지 여러 차례 지방통치제도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현종 9년 남원부는 전주와 같이 지방관이 파견되는 고을로 남원부 아래 2개의 군(임실군 · 순창군)과 7개의 현(장계 · 적성(순창군 적성면) · 거령(임실군 지사면) · 구고(임실군 청웅면) · 장수 · 운봉 · 구례)이 소속되었다. 이때 남원부에는 지부사가 파견되어 2개의 군과 7개의 현의 행정을 관할하였다. 그렇다고 지부사가 모든 행정을 관할 통치한 것은 아니고 제 각각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이 따로 있어 호적이나 조세대장이 따로 만들어지는 등 행정은 별도로 이루어져 지부사(知府事)는 이들을 감독하는 책임만 있었고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그 지역의 향리(鄕吏)

였다.

 

고려 중기 이후 인구가 늘어나고 행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중간 행정기구가 필요하게 되어 전국을 몇 구역으로 나누고 임시관리였던 어사(御使)를 각 지역에 파견하여 그 지방의 행정을 감독하게 하는 어사제도를 중간 행정기구로 두었다. 이 때 어사를 모두 파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라도의 경우 전주계수관도(全州界首官道)와 나주계수관도(羅州界首官道)를 함께 묶어 한 사람의 어사를 파견하였다. 계수관(界首官)이란 당시 주 · 부 · 군 · 현을 다스리는 지방 행정기관의 최고 단위인 경(京) · 목(牧) · 도호부(都護府)의 행정책임자, 곧 장관을 가리킨다. 이 계수관 제도는 고려 말까지 계속되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도제(都制)

가 채택되면서 각 도내의 주 · 부 · 군 · 현을 관할하는 중간기구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남원지역은 여러 번의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는데, 그 중 1895년 이전 까지는 대개 4면(面) 48방(坊)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4개의 면은 오늘날 갈치동, 산동면, 장수군 번암면, 이백면, 주천면의 일부 지역은 동면(東面)에 속하였고, 남쪽 송동면, 수지면, 전남 구례군 산동면 방면 일대는 남면(南面)에, 덕과면, 사매면, 임실군 오수면, 지사면, 장수군 산서면 일부는 북면(北面)에 속했고, 금지면, 주생면, 대산면, 대강면, 전남 곡성읍 일대는 서면(西面)

에 속했다. 그러나 이 4개의 면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떤 때는 48개의 방으로, 어떤 때는 45개의 방으로, 어떤 때는 52개가 넘는 방으로 개편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방에는 수많은 약정과 이정 등의 행정 보조기관과 자체적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기구들이 있었다.

 

1895년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남원은 모처럼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때 전국을 8도(都)로 분할하고 그 아래 23개의 부(府)를 두었는데 전라도는 전주 · 나주 · 남원 · 제주 등 4개의 관찰부(觀察府)로 나누어지게 되어 남원관찰부는 도(都)의 중심지로서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오늘날 전남의 여수시, 광양시, 구례군, 곡성군 일대와 전라북도의 동북부 산간지대를 관할하는 도청소재지가 되었지만 1896년 다시 행정구역을 13개 도(都)로 개편하면서 전라북도에 예속되었다. 그 뒤 1906년까지 남원은 오늘날의 남원시를 비롯하여 장수군 번암면, 산서면 일부와 임실군 지사면, 오수면, 삼계면과 순창군 동계면, 적성면과 전남 구례군과 곡성면 고달면 등을 포함하는 광활한 면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06년 소위 두입지(다른 곳으로 뻗어 나감)

를 정리 할 때 남원은 주변의 장수군, 임실군, 순창군, 구례군, 곡성군으로 분할되어 오늘날의 남원시 지역만 남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일제는 다시 행정구역의 개편작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 조선조 500년 동안 실시하고자 했던 작은 군과 군, 면과 면, 리와 리를 강제로 통합하였다. 그래서 운봉군이 남원군에 편입되었고, 면과 면이 합쳐진 예를 보면, 이백면의 경우 백파면과 백암면을 합쳐 백자가 두 개가 있다고 해서 이백으로 했고, 주천면의 경우 주촌면과 원촌면을 합쳐 주촌의 주자와 원천의 천자를 취해 주천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작업은 그동안 사용해 왔던 우리나라의 고유한 지명을 없애고 양쪽 고을의 이름 가운데 한자씩을 취해 새로운 억지 마을을 만들어 우리의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 뒤 1931년 남원은 읍으로 승격되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읍으로 있다가 읍으로 승격 된지 50여 년이 지난 1981년에야 비로소 시(市)

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는 남원시와 남원군이 통합되어 단일 행정구역인 남원시가 되고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7동 15개 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끝으로 조선조 5백여 년과 지금에 이르는 동안 남원에는 크고 작은 일과 변화가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큰 것들만 몇 가지 간추려 살펴보자.

 

첫째 ㅡ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있었던 남원성(南原城) 싸움이다. 명나라 구원병 3천여 명과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이 이끈 조선 병사 1천여 명, 그리고 주민 등이 왜적 5만6천8백여 명과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싸워 모두 순절하였고, 남원성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는 일본 종군승 경념의 기록처럼 초토화되었다. 이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시신을 거두어 한 곳에 묻고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충열사(忠烈祠)를 짓고 사당 중앙에 '남원부성 순절 만인지위' 란 위패와 좌우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50여명의 위패를 모셨는데 오늘날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또 임진 · 정유난 때 활동한 양대박 · 조경남 · 황진 등 세 사람을 남원의 삼웅(三雄)이라고 부른다. 양대박은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임실 운암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고, 황진은 충청병마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으며, 조경남은 의병장 남원성 싸움 때 유격활동을 하면서 많은 왜적을 물리친 사람이다. 정유재란 때의 남원성 싸움에 대한 생생한 전황은 그가 일기 식으로 기록한 난중잡록(亂中雜錄, 지방 유형문화재 107호)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둘째 ㅡ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가 남원에 유배 와서 1419년 지금의 광한루의 전신인 광통루(廣通樓)를 세운 것이다. 그 뒤 1444년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광통루를 광한루(廣寒樓)로 그 이름을 고쳤고, 전라관찰사였던 정철이 오늘날과 같은 정원을 꾸며 천체 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만들어졌다. 그 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불탄 것을 1626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여 6.25전쟁 중에도 잘 보존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는 보물 제281호, 광한루원은 사적 제 30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셋째 ㅡ

남원은 조선조 숙종(肅宗)시대를 배경으로 쓰인 고전소설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가의 무대가 된 문학의 고장이다. 임진 · 정유재란 이후 조선 사회는 급속도로 신분질서가 해이되고 사회의 혼란을 가져와 그 시대를 배경으로 새로운 질서를 찾고 사랑을 통해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작품들은 천체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여 지상에 건설한 광한루원이 지닌 의미와 천부지지(天府之地)

라는 남원 땅의 속성을 통해 이러한 작품들이 쓰여 남원이 지닌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남원을 무대로 김시습은 금오신화 중의 한편인 만복사저포기를 통해 사랑의 정신을 남겼고, 조위한은 최척전이란 작품을 통해 가족의 중요성을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을 배경으로 전하고 있다.

 

넷째 ㅡ

1740(영조 16)년 남원도호부가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어 전국의 360여 개의 고을 중 맨 끝에 두었던 사실이다. 당시 출생지가 남원이었던 양찬규라는 사람이 역적모의를 했다는 이유로 강등되었는데 다행히 10년 후인 1750(영조 15)년에 다시 복호(復號)

되었다.

 

다섯째 ㅡ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남원 점령과 관음치 전투의 패전이다. 동학군 접주 김개남이 1300여명의 동학군을 거느리고 남원에 들어와 교룡산성에 주둔하면서 경상도로 진출을 도모하다 남원과 운봉의 경계인 관음치와 방아재에서 운봉현의 민보군 박봉양군에 의해 패하여 남원성으로 돌아왔다. 이 때 남원성을 포위한 운봉 민보군에 의해 남원성의 남문과 동문이 파괴되었다. 특히 동학군은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시 금준미주 천인혈 운운 하는 시를 군가로 불렀다고 전해 온다.

 

여섯째 ㅡ

1895(고종 32)

년 5월 지방관제를 바꿔 전국에 23부를 두고 전라도에는 전주 · 나주 · 남원 · 제주에 관찰부를 설치하였다. 이 때 남원관찰부가 설치되어 오늘날 도청소재지가 되어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광양시, 구례군, 곡성군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동북부 산간 지역을 다스렸는데, 초대 관찰사는 백락윤이었고, 이듬해 다시 13도로 개편되어 남원은 전라북도에 예속되었다.

 

일곱째 ㅡ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어 36년간 일제식민 치하에 들어갔을 때 망국을 슬퍼한 남원의 선열들이 수 십 명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상옥, 황석, 김윤필, 정창홍, 김석용, 양철모 등이었으며, 많은 분들이 일제에 항거하였다. 또한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우리 고장 애국지사는 5만여 명이었으며, 19번에 걸친 집회와 시위가 있었고, 만세를 부르다 순절한 분만도 전라북도에서는 가장 많은 42명이며, 부상자 152명, 투옥자 98명에 이르렀다.

 

여덟째 ㅡ

동족상잔의 아픔인 지리산 빨치산토벌 작전이 남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이 때 순국한 6,333명의 영령을 모신 충혼각이 광한루원에 세워졌다가 지금은 지리산 뱀사골 국립공원지리산 북부관리사무소 옆으로 옮겨졌다.

 

남원은 예로부터 충 · 효 · 열 · 예의 고장이라고 불려 왔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남원 사람들은 분연히 일어날 줄 알았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 싸움에서 일만 여명이 순절한 것도,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이루었던 것도, 3.1만세운동 때 그 어느 고장보다도 많은 순절자를 낸 것도 바로 남원에는 의로운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역사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 가지 수 많은 효열자를 배출한 것도 남원은 순리와 도리를 숭상하는 고장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한국 여성의 표상인 춘향의 정절은 오늘날까지 그 맥이 흐트러짐이 없이 이어오고 있는 사랑과 정절의 고장으로서, 우리나라 고전소설을 대표하는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가의 요람인 문학의 고장으로,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로서 송흥록을 비롯한 수많은 명창을 배출한 국악의 고장으로서,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다. 이와 같이 훌륭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어 하늘이 정해준 천부지지(天府之地)

의 땅 남원은 충 · 효 · 열 · 예의 고장임을 자랑으로 알고 내 고장을 위해 봉사하고 가꿀 줄 아는 자랑스러운 남원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번호문화재명지정유형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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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야금 병창 및 산조 강정렬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중요무형문화재
3가야금 병창 및 산조 강정숙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중요무형문화재
4가야금 병창 및 산조 안숙선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중요무형문화재
5개령암지 마애불상군보물 제1123호보물
6경주김씨 보판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61호도지정유형문화재
7과립리 석불입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28호도지정유형문화재
8관서당 남성재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56호문화재자료
9관왕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2호도지정유형문화재
10광한루보물 제281호보물
11광한루원사적 제 303호사적
12교룡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 도지정기념물
13교룡산성 승장동인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7호민속자료
14구천사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58호문화재자료
15귀정사지전라북도 기념물 제 76호도지정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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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기묘제현 수첩보물 제1198호보물
18기묘제현 수필보물 제1197호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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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난중잡록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07호도지정유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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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남원향교 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8호도지정유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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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암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55호문화재자료
112황산대첩비지사적 제 104호 사적

2004.06.13. 01:11
전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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